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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육 [민동필박사의 교육칼럼] 서울 대학은 지식의 노예가 된 사람들의 집합소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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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교육은 분명 두뇌를 발달하는 방향에 맞춰져 있다. 그런데 왜 필자는 지식의 노예가 되는 과정으로 설명을 한 것일까? 이유는 방향성만 두뇌의 발달에 맞춰져 있을 뿐 현실은 두뇌를 가두는 방향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지식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학생이 몰라야 가르칠 것이 생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경험이 없는 사람이 에베레스트산을 오르려 하면 경험과 지식이 많은 사람을 찾아가 배워야 한다. 이처럼 아는 것이 없는 학생을 지식을 가진 교사가 가르치는 곳이 바로 학교다. 문제는 학생이 원하지 않는 것도 배워야 한다는 점에 있다.

에베레스트산을 오르려고 선생님을 찾아 나서는 경우 자신이 원하기 때문에 배우려는 의지가 있지만, 학교의 많은 학생은 수동적이다. 학생에 따라서는 자신이 왜 공부해야 하는지 이유를 찾지 못한 경우도 많다. 물론 반대로 배우는 것을 즐기는 학생들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학교생활도 즐겁고 또 높은 성적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학생은 그리 많지 않다. 어쩌면 에베레스트산을 전문적으로 오르겠다고 선택한 사람 수 정도만큼이 아닐지 짐작해 본다. 필자의 이야기는 그만큼 공부를 자신의 목표로 선택하는 학생은 적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학생들은 어떨까?

많은 학생은 공부해야 미래가 보장된다고 사회가 강조하기 때문에 공부한다고 봐야 한다. 이렇게 크게 공부에 관심이 없는 학생에게 지식을 가르치고 있는데 효율이 늘 이유가 없다. 예를 들어 등산이 아닌 낚시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에베레스트산을 올라갈 때 갖춰야 할 지식을 전달하는 강의를 한다고 가정해 보자. 생각은 낚시에 가 있는데, 누가 집중해서 듣겠는가? 따라서 지식을 가르치는 학교 교육은 지식을 찾아가는 즐거움을 느낀 학생에게만 적합한 교육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많은 학생들이 공부를 힘들어한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있다. 가르치는 학생들을 지식으로 평가하고 또 상과 벌을 주는 과정이다.

필자는 예전에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달을 보라고 달을 가리키는데,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 쳐다본다!’라며 배우는 사람을 탓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상과 벌이 바로 이것이다. 가르쳐주는 것을 잘 배우고 익히는 학생들에게는 상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주는 교육이 학생들을 더 힘들게 만든다. 하지만 모든 학생이 힘들어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교육을 착실하게 잘 받아들이고 또 성적도 높은 학생이 있다. 교육을 통해 공부하도록 길드는 학생이 여기에 속한다. 

에베레스트산을 올라가겠다는 목표를 세운 사람은 전문가들로부터 지식을 전수 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가도 치러야 한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지식을 가진 사람인 선생님에게 복종하며 착실하게 따른다. 그러다 보면 선생님은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게 되고, 학생은 조금이라도 더 다양한 지식을 배우는 선순환으로 연결이 된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선생님이 가르쳐주지 않으면 스스로 지식을 찾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산이 있어 산에 오르듯 지식이 있어 지식을 배우기 때문에 점차 지식이라는 거대한 권력자에게 복종하도록 길든다. 점차 지식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어쩌면, ‘지식의 노예가 되는 것은 좋은 것 아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지식의 노예가 되면 지식이 아닌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 복종한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자면 내가 돈을 추구하기 때문에 돈이 있는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게 되고, 인기를 원하기 때문에 인기가 있는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된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이렇게 지식을 가르치는 과정은 학생들을 지식뿐 아니라 지식인의 정신적 노예로 길들여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 과정을 가속하는 요소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시험이다.

시험을 출제하는 사람은 선생님이다. 이 말은 선생님에 따라서 시험문제가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예측하기 어렵다. 이런 시험이 학생들을 정신적으로 길들이는 과정을 가속한다. 이유가 뭘까? 그것은 바로 주어지는 문제의 해결을 강요하는 부분이다. 회사에 비유하자면 위에서 주어지는 프로젝트를 이행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오히려 잘 된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독자도 있겠지만 이는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 것인지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어 회사의 일반 사원으로 취직해서 승진할 수 있는 곳까지 간 후 은퇴해서 편히 살겠다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교육이 적합하다. 주어지는 문제를 풀면서 살아가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 앞에 기다리는 것이 있다. 목표가 사라지면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없어져 치매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회사원으로 회사를 위한 삶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지금의 교육을 넘어서는 새로운 공부 방법을 익혀야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PonderEd가 제공하는 교육이 유일하다.

필자는 이 칼럼의 제목을 ‘서울대학교는 지식의 노예가 된 사람들의 집합소’라고 적었다. 가르쳐주는 것을 충실하게 배우고 익히며 시험을 통해 주어지는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당연히 학교의 순위가 높을수록 높을 수밖에 없다. 특히 한국이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주어지는 문제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했다고 들었다. ‘똘똘한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지만, 천재는 문제의 발생을 예방한다!’라고. 

유튜브 TV 똥덩이는 http://www.PonderEd.ca의 유튜브 링크를 따라가면 시청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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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동필 박사

· PonderEd Education 대표 

· Infonomics society 자문위원

· World Congress on Special 

    Needs Education 학회장

- 자세한 공부 방법은 필자의 웹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http://kr.PonderEd.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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